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가시오 오사무 (문단 편집) == 데뷔 이전 == 당시 [[교토]]의 야구 명문고였던 헤이안 고교[* 사립학교로 1908년에 창부됐으며, '16년 1월 기준 고시엔 대회에 73회 출전(봄 33회, 여름 40회)한 전국구급 강팀이다.'15년 3월 기준 고시엔 우승과 준우승을 각각 4회 기록했다. 프로야구에도 많이 진출했으며 유명 OB로는 [[기누가사 사치오]], [[송일수]], 우츠미 테츠야가 있다.][* [[장훈(야구선수)|장훈]]과 [[김성근]]도 헤이안 고교 진학을 꿈꿨으나 결국 장훈은 오사카의 나니와 상고로, 김성근은 교토의 가츠라 고교에 각각 진학했다.]에 합격해 진학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당시 와카야마 현립 미노시마 고교의 감독이었던 비토 타다시가 직접 미노시마 고교로 입학할 것을 부탁하여, 결국 미노시마 고교에 입학. 팀의 에이스, 4번 타자로써 활약하면서 1968년 팀을 춘계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코시엔]]에 진출시켜[* 야구부 사상 첫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코시엔]] 진출이었다.] 준결승까지 나아갔으나 그해 춘계 우승팀 오오미야 공고에게 역전패당해 우승엔 실패했다. 그리고 그 해 [[드래프트]]에서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1위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단했다. 그러나 사전 접촉도 없이 급작스레 지명된 것이라서 처음엔 부모랑 히가시오 자신이 반발하여 [[호세이대학]] 진학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결국 히가시오는 입단하기로 결심하고 부모님을 설득해 니시테츠에 입단하게 된다. 히가시오는 후에 "1위 지명이었기 때문에 입단했다. 니시테츠는 1위 지명을 통해 나의 위상을 지켜 주었다. 1위 지명이 아니면 니시테쓰에 입단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근데 자신의 저서인 [[싸움 투구법]]에서는 “2위에도 들어가 있었고, 3위라도 들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참고로 이해 드래프트에서 니시테츠는 히가시오 외에도 [[노리카에 히사요시]]란 투수를 2위, [[우사미 카즈오]]란 투수를 3위로 지명했지만 노리카에는 프로 통산 7년간 단 1승도 못하고 1976년 초라하게 은퇴, 우사미는 입단한지 반년도 안 돼(1969년 3월 14일) 연습 중 가슴에 타구를 맞는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